2014. 1. 7. 03:55

0. 60년대 그룹사운드 붐

(더 스파이더스, 더 타이거스, 더 템프터즈.)

 

아이돌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때는 70년대이지만 아이돌같은 인기를 얻으면서 활동하는 가수들이 등장한건 60년대로 올라간다(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50년대 미소라 히바리까지 포함할 수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패전후, 미군정의 관리하에 들어간 일본은 미국의 영향아래 척베리,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로큰롤이 유입되고, 60년대에 들어서는 비틀즈를 비롯한 브리티쉬 비트음악의 영향을 받아 그룹사운드 붐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그룹사운드 붐은 66년 비틀즈가 내일 했을때 절정을 맞이하면서 다양한 밴드가 탄생하게 된다.

60년대 초반에는 재키 요시카와와 블루 코메츠(ジャッキー吉川とブルー・コメッツ), 더 사베지(ザ・サベージ, The Savage), 더 스파이더스(ザ・スパイダース, The Spiders) 이 세 밴드가 대표적이고, 비틀즈 내일 이후 그룹사운드 붐이 절정을 맞이했을땐 옥스(オックス, OX), 더 타이거스(ザ・タイガース, The Tigers), 더 템프터즈(ザ・テンプターズ, The Tempters), 이 세 밴드가 아이돌같은 인기를 얻으며 활동한다.



더 템프터즈 - エメラルドの伝説



더 타이거스 - 君だけに愛を. 열광적인 환호성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60년대를 휩쓸었던 그룹사운드 붐은 70년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사그라들면서, 1970년 전후반에 대부분의 그룹사운드 밴드가 해체하면서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더 스파이더스 출신 사카이 마사아키는 솔로 가수를 비롯해 배우, MC로서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활동중이며, 더 타이거스 출신 사와다 켄지는 솔로 가수로서 60년대 이상의 인기를 얻으며 70년대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현재까지 가수와 배우를 오가며 활동 중이며 작년에 더 타이거스를 재결성하면서 다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더 템프터즈 출신 하기와라 켄이치 역시 솔로 가수와 배우로서 현재까지 활약하고 있다. 재키 요시카와와 블루 코메츠는 멤버 교체와 해체를 반복하다 2000년대에 다시 재결성해 현재까지 활동중이다.



1. 70년대 오디션 방송의 인기와 시작된 아이돌 붐

(스타탄생! 촬영현장)


70년대로 넘어오면서 스타탄생!(スター誕生!)를 비롯해 당신을 스타로!(あなたをスターに!), 당신이야말로 스타다!(君こそスターだ!), 호리프로 탤런트 캐러밴(ホリプロタレントスカウトキャラバン), 잡지 세븐틴에서 실시했던 미스 세븐틴(ミスセブンティーン) 등 여러 오디션이 생기면서 수많은 아이돌 스타가 탄생한다. 

76년부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호리프로 탤런트 캐러밴은 1회 그랑프리를 수상한 사카키바라 이쿠에부터 호리 치에미, 이모리 미유키, 후카다 쿄코, 이시하라 사토미, 그리고 작년 합격자 유우키 미오까지 매년 스타를 탄생시킨다. 

75년에 반년간 테레비 아사히에서 방영된 당신을 스타로!는 2년전 같은 방송국에서 열렸던 오디션 방송 스타 온 스테이지 당신이라면OK!(スター・オン・ステージ あなたならOK!)에 이어지는 오디션 방송이다. 반년만에 막을 내렸지만 오카다 나나 등 여러 스타들을 배출해냈다.

73년부터 80년까지 후지테레비에서 방영된 당신이야말로 스타다!는 이시카와 히토미, 다카다 미즈에 등의 스타들이 탄생했다.

특히 71년부터 83년까지 니혼TV에서 방영되었던 스타탄생!은 데뷔 1호 스타인 모리 마사코를 시작으로 사쿠라다 준코, 야마구치 모모에, 핑크 레이디, 이와사키 히로미, 이시노 마코, 코이즈미 쿄코, 나카모리 아키나, 오카다 유키코 등 12년간 아이돌스타의 등용문으로 명성을 떨치면서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대표적인 오디션 방송이다. 



2. 신 세딸들(新三人娘)

아마치 마리(天地真理), 미나미 사오리(南沙織), 코야나기 루미코(小柳ルミ子).

 

OO세딸들(OO三人娘)라는 단어는 기획사나 언론, 음반사 등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나이대의 3명의 여성들을 묶어서 통칭하는 말로 탄생했는데, 최초에 OO세딸들이라고 붙여진 탤런트는 54년에 시작한 NHK라디오 드라마 얀보우, 닌보우, 톤보우(ヤン坊ニン坊トン坊)에 출연한 쿠로야나기 테츠코(黒柳徹子), 요코야마 미치노(横山道代), 사토미 쿄코(里見京子)에게 붙여진 세딸들(三人娘)이 시초이며, 후에 뒷세대와 구별하기 위해 초대 세딸들(初代三人娘) 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영화 가위바위보 딸(ジャンケン娘)에 출연한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에리 치에미(江利チエミ), 유키무라 이즈미(雪村いづみ)에게도 세딸들이라고 붙여졌지만 역시 구별을 위해 원조 세딸들(元祖三人娘)이라고 부른다. 

71년에 데뷔한 아마치 마리, 미나미 사오리, 코야나기 루미코 세 명의 탤런트에게 세딸들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72년엔 셋이 공동으로 콘서트도 열기도 했다. 신 세딸들은 후에 구별을 위해 붙여진 것이다. 

미나미 사오리의 데뷔곡인 17세(17才)는 당시에도 인기 있었지만 89년에 모리타카 치사토의 데뷔 싱글로 발표하면서 또 다시 인기를 얻게 된다. 오키나와 출신인 미나미 사오리가 데뷔할 당시엔 아직 오키나와가 정식으로 일본에 넘어오기 전이라 여권이 필요했었다. 78년 학업을 위해 은퇴, 79년에 유명 사진작가 시노야마 기신과 결혼해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차남은 배우로 활동중인 시노야마 아키노부. 91년에 몇년간 가수활동을 재개한적이 있지만 현재는 다시 중단된 상태이다.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출신의 코야나기 루미코는 데뷔곡인 나의 죠카마치(성 아랫마을, わたしの城下町)가 오리콘 12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면서 여성 솔로 부문에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연속 1위 기록을 갖고 있다. 83년엔 일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는 등 배우로서도 실력을 인정받으며 현재까지 활동을 하고 있다.

아마치 마리는 가수로 데뷔후 저연령층 대상 방송에 출연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되어 73년엔 여성 브로마이드 판매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77년에 건강에 이상이 생겨 2년간 휴식을 취한후 다시 복귀, 80년대에도 활동을 이어나간다. 80년대엔 누드 사진집을 발매하는 등 성인 탤런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86년에 결혼하지만 96년에 이혼, 그 후 활동은 활발하진 않지만 조금씩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독특한 목소리가 인상적으로 성대묘사 레파토리에 자주 등장한다.



코야나기 루미코 - わたしの城下町

아마치 마리 - 恋する夏の日

미나미 사오리 - 17才



3. 아사오카 메구미(麻丘めぐみ), 아그네스 챤(アグネス・チャン)

아사오카 메구미, 아그네스 챤.

 

잡지 아역모델 경험이 있는 아사오카 메구미는 72년 싹트다(芽ばえ)로 가수 데뷔해 4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그 해 일본 레코드 대상 신인상을 수상한다. 이어서 73년에 발표한 나의 남자친구는 왼손잡이(わたしの彼は左きき)가 크게 히트한다. 당시 아사오카 메구미가 하고 있던 히메컷(姫カット)이라는 헤어스타일이 유행하기도 했다. 77년 결혼과 동시에 은퇴를 했었지만 83년에 이혼을 하면서 연예계 복귀, 현재는 배우로 활동하면서 간간히 가수활동도 하고 있다.

홍콩 출생인 아그네스 챤은 일본에서 데뷔하기 전에 이미 71년 홍콩에서 데뷔를 해 인기를 얻고 있었다. 홍콩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한 작곡가 히라오 마사아키의 소개로 72년에 일본에서 데뷔하게 된다. 어눌한 말투로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 모습과 귀여운 외모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계속 음악활동을 하면서 대학교에 입학해 86년 결혼을 한 뒤에도 계속 공부를 이어가 후에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87년에 아그네스 논쟁이라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를 출산해서 방송활동을 쉬고 육아에 전념하려고 했지만 방송국에서 복귀를 종용해서 아이를 데리고 방송국에 갔을때 아이를 직장에 데리고 온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시작된 논쟁이다. 지지파와 비판파로 갈라져서 2년간 뜨겁게 논쟁을 했었고 현재까지도 입에 오르내리는 사건이다.

98년에 초대 일본 유니세프 협회 대사에 취임하고, 소설도 발표하면서 작가, 가수에 교육활동까지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아동포르노에 대해 창작물까지도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쳐 창작자들의 표현의 자유와 부딪치기도 했다.


아사오카 메구미 - わたしの彼は左きき

아그네스 챤 - 白いくつ下は似合わない



4. 꽃의 중3 트리오(花の中3トリオ)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恵), 모리 마사코(森昌子), 사쿠라다 준코(桜田淳子)

 

오디션 방송 스타탄생!을 통해 데뷔한 3명의 동갑내기 아이돌을 묶어서 꽃의 중3 트리오 라고 불렸다. 이후 나이를 먹어가면서 꽃의 고1 트리오, 꽃의 고3 트리오 라고 나이에 맞춰 불리기도 했지만 현재 이 셋을 부를때 보통 꽃의 중3 트리오라고 한다.

이 셋 중 가장 먼저 데뷔를 한 사람은 모리 마사코다. 스타탄생!을 통해서 가장 먼저 데뷔를 한 연예인으로 당시 방영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스타탄생!을 인기방송에 등극시키는데 큰 역활을 하기도 했다. 71년에 스타탄생!을 통해 소속사와 계약을 맺고 이듬해 다른 두명보다 1년 먼저 데뷔를 했다. 데뷔곡인 선생님(せんせい)이 크게 히트하면서 많은 인기 속에 가수와 배우로서 활약했고, 83년에 월동제비(越冬つばめ)가 또다시 히트하면서 선생님과 월동제비는 모리 마사코 하면 떠오르는 대표곡이 된다.

86년 엔카가수 모리 신이치와 결혼을 하면서 은퇴를 했고, 3형제를 키우며 간간히 TV에 얼굴에 드러내기만 했었다. 부부간의 공동 콘서트건과 장남이 연예계 진출 문제로 부부간의 다툼을 계기로(모리 신이치는 학업에 열중하길 바랬고, 모리 마사코는 본인이 하고 싶은대로 하길 바랬다) 사이가 틀어지면서 05년 이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06년에 다시 연예계 복귀, 꽃의 중3 트리오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가수로 활동중이다.

장남은 쟈니스에 입소해 초기 NEWS 멤버로 활동하다 곧 쟈니스에서 나와 밴드 ONE OK ROCK에 가입하여 보컬로 활동중이고, 차남은 테레비도쿄에 입사, 막내 역시 쟈니스에 입소했다가 3년뒤 그만두고 11년 밴드 MY FIRST STORY를 결성해 보컬로 활동중이다.

스타탄생!에서 사상 최고 점수를 받고, 결선에서 계약을 원하는 소속사가 25개나 되면서 이 역시 최다 기록을 남기며 화려하게 데뷔한 사쿠라다 준코에게 관계자가 남긴 모모에가 원석이라면 준코는 보석 그 자체다 라는 말이 유명하다. 3번째 싱글 나의 파랑새(わたしの青い鳥)가 히트를 하면서 70년대 인기 가수로 활약하면서 배우로도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배우의 일이 많아지더니 80년대에 들어가선 완전히 배우로 전향하고, 배우로서도 사랑을 받으며 활약했다.

92년에 기자회견을 통해 통일교에 가입했있음을 밝히고 통일교 합동 결혼식에 참석해 결혼을 할 것임을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결혼 후 사실상 연예계를 떠났고, 통일교 행사때 가끔 얼굴을 드러내곤 했지만 연예활동은 일체 거절하고 가정에 충실하면서 지내다 06년 에세이집을 발표하면서 오랜만에 근황을 알리기도 했다. 13년에 선뮤직 회장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얼굴을 드러내 화제가 되기도 하고, 인터뷰에서 가수가 아닌 여배우로서 복귀를 희망하는 인터뷰를 하면서 연예계 복귀를 앞두고 있다.

스타탄생!에서 준우승을 하면서 데뷔를 한 야마구치 모모에의 데뷔곡은 예상외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었다. 그러다 소녀성을 노래한 어느 여름 날의 경험(ひと夏の経験)이 히트하면서 여느 아이돌과는 다른 성숙한 노선으로 나아갔다. 처음부터 섹시노선으로 가는 가수와는 달리 순박해 보이는 소녀가 소녀성에 관한 노래를 부르면서 많은 화제와 논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노선은 후에 오냥코클럽에 이어 AKB48까지 이어진다. 당시 소녀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는 짖궂은 질문에 진심 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가수로서 22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했는데 모두 높은 음악성과 무대위에서의 카리스마로 현재까지 회자되고 있는 70년대를 대표하는 가희로 남아있다. 요코스카 메구미라는 필명으로 작사가로도 이름을 남겼다.

배우로도 활동을 하는데 미우라 토모카즈와 영화나 드라마에 공동출연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대로 연인으로 발전해 80년에 결혼과 동시에 은퇴를 했다. 은퇴 콘서트에서 마지막에 마이크를 바닥에 내려놓고 퇴장하는 모습이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다. 7년 반 정도의 연예인 활동을 끝으로 21세에 은퇴 이후 연예계에 일체 얼굴을 내밀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있다. 하지만 워낙 유명세를 떨쳤던 스타이다보니 은퇴 이후에도 기자들이 쳐들어가거나 몰래 사진찍는 일이 잦아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미우라 토모카즈와 야마구치 모모에 부부는 아직까지 싸워본적이 없다고 할 만큼 부부사이가 좋기로 유명하다. 모모에의 장남은 밴드 Peaky SALT의 보컬로 활동하다 현재는 배우로, 차남 역시 배우로 활동중이다.



모리 마사코 - せんせい


사쿠라다 준코 - わたしの青い鳥

야마구치 모모에 - ひと夏の経験



5. 오카다 나나(岡田奈々), 이와사키 히로미(岩崎宏美)

오카다 나나, 이와사키 히로미.

 

오카다 나나는 당신을 스타로!에서 2회 챔피언이 되면서 75년에 데뷔를 했다. 청춘의 비탈길(青春の坂道) 등의 노래가 히트하면서 인기 아이돌에 올랐고, 포키의 초대 CM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엔 괴한에게 감금을 당해 성폭행을 당했고, 후에 감옥에 간 범인은 감옥에 있던 오카다 나나의 팬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를 당해 정신병에 걸렸다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신기한 TV 서프라이즈에선 그 이상한 소문을 방송에 내보내기도 했었다.

진상은 77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취를 시작했을때 집에 괴한이 침입해 양손에 30바늘 정도의 중상을 입은 사건이다. 괴한은 넥타이로 오카다의 손을 묶어 놓고 도망을 갔고,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은채 공소시효가 지났다. 사건 이틀뒤에 드라마 촬영에 참석하면서 계속 활동을 해나갔다. 성폭행 당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만 남았던게(물론 본인은 부정했다) 우리나라에 넘어와 이런저런 살이 붙여져 비운의 아이돌 취급을 받고 있다. 

20살 이후엔 배우로 완전히 전향해 현재까지도 TV드라마와 영화에 출연중이다.

스타탄생!을 통해 데뷔한 이와사키 히로미는 두번째 싱글 로망스(ロマンス)가 밀리언에 가까운 히트를 하며 단숨에 인기 가수 반열에 올랐다. 연기자로도 활동하지만 가수활동이 주를 이뤘고, 82년엔 성모들의 자장가(聖母たちのララバイ)가 성공하면서 가수의 자리를 굳건히 다졌다. 뮤지컬과 가수 활동을 번갈아 가며 활동하다 88년에 결혼, 슬하에 두 아이가 있다. 남편 성에 따라 마스다 히로미(益田宏美)로 활동한다. 95년에 이혼을 하고 다시 예전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09년에 뮤지컬 배우 콘 타쿠야와 재혼했다.

동생은 노래 터치(タッチ )로 유명한 80년대 인기 가수 이와사키 요시미(岩崎良美). 후에 둘이 같이 공동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오카다 나나 - 青春の坂道

이와사키 히로미 - ロマンス



6. 캔디즈(キャンディーズ), 핑크레이디(ピンクレディー)

캔디즈(후지무라 미키, 이토 란, 다나카 요시코), 핑크레이디(미이, 케이)

 

72년 NHK 새 방송 가요 그랜드 쇼(歌謡グランドショー)에 마스코트걸로 발탁되어 캔디즈라는 이름이 붙여진 후지무라 미키, 이토 란, 다나카 요시코 이 세 명은 원래 가수로 데뷔할 예정은 없었다. 단순히 방송의 마스코트걸로 활동하다가 음반 관계자에게 스카우트 받아 73년에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데뷔 후 히트곡이 나오지 않고 있다가 75년 5번째 싱글 연하의 소년(年下の男の子)가 처음으로 히트하게 된다. 이 싱글의 히트로 원래 메인이었던 다나카 요시코 대신 이토 란이 해체할때까지 계속 센터에서 활약하게 된다. 이후 첫봄바람(春一番), 상냥한 악마(やさしい悪魔), 무더위 속 문안인사 올립니다(暑中お見舞い申し上げます) 등의 곡이 연달아 히트한다.

귀여운 안무와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콩트에 적극적인 모습으로 세 멤버 모두 골고루 사랑을 받는다. 동시대에 활약중이던 핑크레이디와 비교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라이벌이라기 보단 서로 열심히 힘내자는 분위기가 강했다.

77년, 인기절정인 시절에 갑작스런 해체를 발표했다. 당시 이토 란이 평범한 여자아이로 돌아가고 싶다 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78년 해산콘서트를 마지막으로 4년 반의 캔디즈 활동을 마쳤다. 해체 이후 재결성은 없었지만 사적으로 셋이 종종 모이곤 했다.

이토 란은 80년에 연예계 복귀해 89년 미즈타니 유타카와 결혼, 현재까지 배우로 활동중이며, 다나카 요시코 역시 80년에 복귀해 솔로가수와 배우로서 활동하다 91년에 결혼, 11년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후지무라 미키는 83년에 기간한정으로 복귀하여 활동 후 다시 은퇴를 하여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다나카 요시코 장례식때 모습을 드러냈다.

스타탄생!에 참가했을땐 소박한 모습이던 핑크레이디 두 사람은 소속사와 계약 이후 소속사의 방침 아래 컨셉을 바꿔 섹시 노선으로 나가게 된다. 커플링으로 예정되었던 페퍼경부(ペッパー警部)를 A면으로 바꿔 데뷔를 한 이후 섹시한 의상과 개성적인 음악과 춤으로 화제를 모았다. 핑크레이디의 최대 히트곡인 UFO의 경우는 전국민이 춤을 따라했다고 할만큼 인기였다. 당시엔 잠 잘시간, 화장실을 갈 시간 조차 없을 만큼 바뻐서, 후에 이 당시를 회상할때 자신들이 뭘 했는지 조차 기억이 안날정도라고 한다.

79년에는 미국진출을 하며 Kiss In The Dark가 빌보트 차트 37위에 오르기도 했다. 잠깐동안 미국에서도 인기가 있었으나 오래가지 못했고, Pink Lady and Jeff라는 핑크레이디가 출연하는 미 쇼프로도 만들어졌으나 6회만에 종영하기도 했다. 종영의 이유가 최악의 쇼프로라고 혹평의 소리가 나올만큼 반응이 좋지 않았다는 이유와 인기가 있었으나 핑크레이디 측에 요청으로 종영이 되었다는 상반되는 이유가 나오고 있다.

과도한 스케쥴로 방송국과 소속사와 멤버들간에 의견 차이가 벌어지면서 결국 80년에 해체를 발표한다. 

81년 마지막 콘서트를 마치고 둘은 연예계에 남아 각자 활동을 계속 이어 나가고 중간에 종종 기간한정으로 재결성을 하기도 했다. 10년에 다시 재결성을 해서 본격적으로 핑크레이디로 다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캔디즈 - 暑中お見舞い申し上げます


핑크레이디 - ペッパー警部



7. 아그네스 람(アグネス・ラム)


하와이출생 중국계 미국인 아그네스 람은 74년 스카우트 받아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아이돌이라면 가수활동이 주를 이루던 시대에 그라비아 사진집과 CM출연을 주를 이뤄 현재 그라비아 아이돌의 시초로 평가 받고 있다. 

음악활동도 있었지만 큰 인기는 없었고, 86년 결혼 이후엔 활동을 거의 멈춘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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